|
민주노총부산본부 황이라 상담부장이 KTX승무원 해고자들의 천막농성장을 찾던 날.. 그 곳에서 중학교 동창을 보았다.
자신도 지하철매표소 비정규 노동자로 근무하다 해고되어 투쟁으로 기나긴 시간을 보냈음에 친구의 그 투쟁이 더 안쓰럽고도 당당해 보인다.
===== [[ 편지 글]] =====
ktx동지들이 부산역에 천막을 쳤다는 얘기를 듣고 두 번째로 농성장을 찾았던 날,
처음 농성장을 방문하고 도지원을 똑 닮은 승무원 동지를 봤다고 얘기했던 그 동지가 바로 내 중학교 동창 박지예, 너라는걸 알았다.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 뒤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상념들로 마음이 참 복잡하고 착찹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옷장 속 깊이 쳐 박아 둔 졸업앨범을 꺼내 보았다.
졸업앨범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을 만큼 시간이 많이도 흘렀더라.
13년만에 꺼내 보는 모습들이 우습기도 하고 낯설었다.
우리는 열여섯 사소한일에도 깔깔대며 웃음을 참지 못하던 중학생 소녀에서
사소한 일상마저 눈물이 되고, 서러워 몸살이 되는
스물아홉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로 다시 만났다.
늘 무언가가 되고 싶었고, 어딘가를 가고 싶었고, 하고 싶었던...
그것이 너무 자주 바뀌어버려 어제의 희망과 소망이 오늘은 거짓말이 되어버렸던
그때 우리는 지금보다는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촌스러운 듯 했지만 순수했고, 새침떼기 같은 듯 했지만 당당했고,
산만한 것 같았지만 늘 꿈꿀 수 있었던 희망이 있었으니까.
그때 우리는 무엇을 꿈꾸었을까.
그때 우리가 상상했던 20대의 모습은 어떤 것 이었을까.
2년 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 경미는 24시간 중에 18시간을 컴퓨터에 앉아 도면을 치고 몇 채의 집을 지은 지도 모를 만큼 일을 하면서도 월셋방 하나 구하기 힘들어 고시원에서 잠을 자고,
전문대 나와서 9시 출근에 6시 퇴근하고 그만한 월급 받아 가면 좋은 직장 아니냐며 거기다 정규직이어서 좋다던 지영이는 재작년부터 해마다 재계약을 하는 그야말로 희안한 정규직이 되었고,
4년제 미대를 졸업하고도 남들 다 가는 유학 한번 못 다녀와서 자기 인생이 이 모양이라고 늘 타령으로 사는 희자는 동네 조그만 미술학원에 하루 5시간 파트타임 강사를 한다.
5살 때부터 시작한 무용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화장품 방판을 하는 정선이도, 대학졸업 한 이후로 줄곧 공무원시험 공부만 하고 있는 지현이도...
그때의 꿈을 아직도 꾸고 있을까...
난 가끔 우리가 속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더 이상 꿈꾸지 않고, 당장 내일의 계획도 가지지 못하고 사는 우리지만,
그래도 저마다 하나씩 자기만의 이유와 위로들로 살아가고 있지 않니.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진짜 이유는 아는지 모르는지.
포기할건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야.
하지만 한번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었던 우리는 사실 포기할 것조차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믿고 있던 그 평범한 삶이란
아닌 것도 기다, 나쁜 것도 좋다 하며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의 그 싸움이 더딘 것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너의 그 어깨가 더 쳐지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늘 미래에는 불안이 기다리고, 과거에는 후회가 머문다.
우리가 만약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아니면 조금 일찍 떠날 수 있었다면,
그러면 조금 덜 후회스러웠을까.
2년 전, 1년을 넘게 시청 앞 광장에 친 천막농성장을 집을 삼고,
서면 한복판에서 잠을 자던 내게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냐,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 알아보는게 좋겠다며
걱정과 안타까움을 전하던 친구들에게 주눅들지 않았던건
비록 안된다 하더라도 결국엔 내가 옳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게으르고, 용기가 없어 그러고 사는거 아니냐, 유난 떨지 말고 평범히 살아라며 비아냥대던 사람들에게도 당당 할 수 있었던 건
나보다 나을 것도 없는 그 사람들의 비겁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게 그때 그 시간속에 후회는 없다.
그런데 얼마 전 부산역 천막농성장에서 ktx동지들을 만났을 때 선뜻
안부를 물어보고, 힘들지 않냐는 위로를 건내 볼 수가 없었던 건
결국에는 버텨내지 못하고 접어버렸던 내 반쪽짜리 당당함에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어제 새벽 ktx동지들 5명이 서울역철탑에 올라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얘기를 하던 사람도 나도,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드센 년들 시집도 못가지 하는듯한 어른들의 차가운 시선...
저렇게 안될려면 공부 열심히 해 하던 말들..
바닥에 팽겨쳐지고, 손목이 꺾이던 시간들...
칼에 베이는것보다 더 아프게 마음을 도려내고 상처가 되었던 시간을 900일을 버티고 견뎌냈던 너희가.
900일이라는 시간동안 단 하루도 마음에서 내려 본 적 없는 소망을, 단 1초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던 그 사람들에게 너희가 못할 일이란 게 무엇일까,
드센 년이 되든, 미친년이 되든, 지금 순간 무엇이 되든
내 자존감을 지키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들 어떨까.
누가 무슨 자격으로 너희들에게 욕을 하고 멸시하며, 충고 할 수 있을까.
오늘이든, 내일이든..언제든,
그 철탑에서조차 쫒겨 내려오면, 이제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미치지 않고 버텨온 900일이라는 시간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다.
졸업앨범을 덮으며 모서리, 구석마다 써놓은 친구들의 짧은 편지글들 중 유독 하나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우리 이 다음에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자”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참 지키기 힘든 약속이다 싶었다.
이 말을 했던 친구는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까.
13년 만에 불쑥 나타난 난 너에게 얼마나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일 수 있을까.
나와 또 어제는 너와 함께였지만 언제부턴가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떠난 그 동지들에게
너와 그리고 이 자리를 지키는 ktx동지들은
어쩌면 살아가면서 때때로 마주하게 될 우리의 나약함과 비겁함을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만큼은 넌, 그 누구보다도 당당한 친구이자 동지다.
|
|
